1980년대, 반도체와 가전, 컴퓨터 하드웨어는 일본이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다음 시대의 패권을 가를 거라고 모두가 믿었던 산업들이었죠. 그런데 일본은 그 산업들을 다 손에 쥐고도, 뒤이은 정보혁명에서는 미국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조지워싱턴대 정치학자 제프 딩은 저서 『Technology and the Rise of Great Powers』에서 이 반전을 설명하는 두 가지 이론을 대비시킵니다. 오라일리미디어 창업자 팀 오라일리는 이 이론이 국가뿐 아니라 지금의 AI 경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짚었습니다.
출처: Ordinary Engineers, Not Heroic Inventors – O’Reilly (Tim O’Reilly)
발명이 이기는가, 확산이 이기는가
딩이 “선도부문 이론”이라 부르는 첫 번째 설명은 이렇습니다. 철강, 철도, 자동차, 반도체처럼 새로운 산업이 뜨면 그 발명을 주도한 나라가 독점적 이익과 전후방 연쇄효과를 다 가져간다는 겁니다. 영국은 증기기관으로 1차 산업혁명을 이겼고, 미국은 전기화와 내연기관, 대량생산으로 2차 산업혁명에서 영국을 앞질렀습니다.
딩은 여기에 “확산이론”이라는 다른 설명을 내놓습니다. 증기기관이나 전기, 컴퓨터처럼 정말 근본적인 범용기술은 한 산업만 키우는 게 아니라 경제 전체로 퍼져나갑니다. 이때 국가의 경제 주도권은 그 기술을 발명한 쪽이 아니라, 가장 빠르고 넓게 실무에 스며들게 한 쪽에게 돌아갑니다. 미국이 정보시스템 혁명에서 일본에 뒤처지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하드웨어 경쟁에서 이겨서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를 통해 컴퓨팅의 힘을 경제의 모든 구석까지 침투시켰기 때문이죠.
지금 AI 산업과 각국의 전략을 지배하는 건 명백히 선도부문 이론입니다. 가장 크고 좋은 모델을 가진 회사와 나라가 이긴다는 전제죠. 나머지는 들러리로 취급됩니다.
전기모터를 갈아 끼운다고 공장이 바뀌지 않았다
딩이 인용한 경제사학자 폴 데이비드의 1990년 논문 “The Dynamo and the Computer”는 이 확산이론을 뒷받침하는 유명한 사례를 다룹니다. 공장들이 처음 전기화됐을 때, 사람들은 증기기관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전기모터 하나만 갈아 끼웠습니다. 축과 벨트로 이어진 기존 동력 전달 구조는 그대로 뒀죠. 생산성은 거의 오르지 않았습니다.
진짜 생산성 향상은 수십 년 뒤, 새로운 세대의 기업가와 공장 설계자들이 전기가 실제로 가능케 한 것을 중심으로 공장 자체를 다시 설계하면서 찾아왔습니다. 커다란 모터 하나 대신 기계마다 작은 모터를 따로 달고, 작업 흐름에 맞춰 공장 배치 자체를 바꾼 겁니다. 기술을 갈아 끼우는 일보다, 그 기술에 맞게 일하는 방식을 다시 짜는 일에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던 셈입니다.
최신 모델보다 체화한 방식이 남는다
이 역사가 AI에 주는 함의는 단순합니다. 최고 성능의 모델은 곧 누구나 쓸 수 있게 됩니다. 프론티어 모델의 성능은 지금도 무서운 속도로 좋아지고 있고, 그 확산 자체는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40년 전 가장 빠른 PC가 순식간에 대중화됐던 것과 비슷합니다.
시간이 걸리는 건 그 기술에 맞춰 일하는 방식을 다시 짜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노하우는 대개 모델을 만든 연구소가 아니라, 그 도구를 매일 쓰는 사람들 안에 쌓입니다. 모델은 몇 달마다 세대가 바뀌지만, 도구를 내 업무 맥락에 맞게 다루는 감각은 그 세대교체를 통과해 계속 남습니다.
그렇다면 정작 눈여겨봐야 할 건 어느 회사가 최신 모델을 냈는지가 아니라, 지금 손에 쥔 도구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내 작업에 맞게 다루고 있는가일지 모릅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