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완성되며 인류는 30억 개의 유전자 염기서열, 즉 우리 몸의 ‘설계도’를 모두 해독했습니다. 하지만 2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근본적인 질문이 남아있습니다. 이 거대한 유전자 정보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며, 작은 변화가 우리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구글 딥마인드가 2025년 6월 25일 공개한 AlphaGenome이 게임 체인저로 등장했습니다. 이 AI 모델은 단순히 유전자 서열을 읽는 것을 넘어서, DNA의 작은 변화가 실제 생물학적 과정에 어떤 파급효과를 일으킬지 예측할 수 있는 혁신적인 도구입니다.
게놈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기술적 혁신
AlphaGenome의 가장 놀라운 점은 최대 100만 개의 DNA 염기서열을 동시에 처리하면서도 개별 염기 수준의 정밀한 예측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기존 모델들이 처리 범위와 해상도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던 트레이드오프를 완전히 극복한 것입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이 모델이 유전자 조절의 수천 가지 분자적 특성을 종합적으로 예측한다는 점입니다. 유전자가 언제 시작되고 끝나는지, 어떻게 잘라져서 조합되는지(스플라이싱), 얼마나 많은 RNA가 생산되는지, 어떤 단백질이 DNA에 결합하는지까지 포괄적으로 분석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RNA 스플라이싱 과정을 직접 모델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척수성 근위축증이나 일부 낭포성 섬유증 같은 희귀 유전 질환들이 바로 이 스플라이싱 오류로 발생하는데, AlphaGenome은 이런 복잡한 과정까지 염기서열만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출처: Unsplash
기존 모델들과의 차별화된 접근법
AlphaGenome은 구글 딥마인드의 기존 생명과학 AI들과 어떻게 다를까요?
AlphaFold가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예측한다면, AlphaMissense는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 부분(전체 게놈의 2%)에서 일어나는 변이의 영향을 분석합니다. 반면 AlphaGenome은 나머지 98%를 차지하는 비코딩 영역에 집중합니다. 이 영역은 유전자 활동을 조절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 기능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센터의 컴퓨터생물학자 칼렙 라로(Caleb Lareau) 박사는 “우리가 가진 30억 개의 DNA 염기서열 중에서 개인마다 약간씩 다른 부분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것은 지금까지 그런 차이점들을 모델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고 평가했습니다.
실제 연구에서의 혁신적 활용 가능성
AlphaGenome이 가져올 변화는 이론적 수준을 넘어 실제 연구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질병 연구의 새로운 차원
기존에는 특정 유전자 변이가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려면 복잡한 실험실 연구가 필요했습니다. 이제는 컴퓨터상에서 빠르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알츠하이머병과 관련된 수천 개의 유전적 차이점들 중 어떤 것이 실제로 분자 수준에서 영향을 미치는지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연구팀은 T세포 급성 림프모구성 백혈병(T-ALL) 환자들에게서 발견된 특정 돌연변이를 AlphaGenome으로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해당 돌연변이가 MYB DNA 결합 모티프를 도입하여 근처의 TAL1 유전자를 활성화한다는 것을 예측했고, 이는 이미 알려진 질병 메커니즘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희귀질환 진단의 혁신
현재 많은 희귀질환 환자들이 DNA를 해독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뮌헨공과대학의 줄리앙 가뇨르(Julien Gagneur) 교수는 “우리는 환자의 게놈을 얻을 수 있지만, 어떤 유전적 변화가 질병을 일으키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하다”고 지적했습니다. AlphaGenome은 이런 의학적 미스터리를 푸는 새로운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극히 희귀한 암 환자들의 경우, 수많은 생소한 돌연변이들 중 어떤 것이 실제 문제의 근원인지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제는 AlphaGenome이 그 중에서 치료 타겟이 될 수 있는 핵심 돌연변이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합성생물학의 새로운 가능성
AlphaGenome의 예측 능력은 자연에 존재하는 DNA를 분석하는 것을 넘어, 특정 기능을 가진 인공 DNA를 설계하는 데도 활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경세포에서만 활성화되고 근육세포에서는 비활성화되는 유전자를 만들거나, 특정 조건에서만 작동하는 치료용 유전자를 설계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현재의 한계와 미래 발전 방향
혁신적인 기술이지만 AlphaGenome도 현재 몇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큰 제약은 10만 개 이상 떨어진 매우 먼 거리의 조절 요소들의 영향을 정확히 포착하는 것이 여전히 어렵다는 점입니다. 또한 세포나 조직별 특성을 더 정밀하게 포착하는 능력도 개선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델이 개인의 게놈 예측용으로 설계되거나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23andMe 같은 서비스에서 제공하는 개인적 특성이나 조상 정보 예측과는 다른 차원의 도구입니다. 대신 개별 유전적 변이의 분자적 효과를 특성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AI 기반 생명과학 연구의 미래 전망
AlphaGenome의 등장은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도구가 추가된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생명과학 연구 전체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구글 딥마인드 CEO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는 올해 “가상 세포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이 나의 꿈”이라고 말했습니다. AlphaGenome은 이런 비전을 향한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비록 전체 세포를 완전히 모델링하지는 못하지만, DNA의 광범위한 의미론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입니다.
앞으로는 가상 실험실에서 약물 연구를 진행하거나, 아예 처음부터 새로운 생명체를 설계하는 것도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이미 일부 연구자들은 이런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과학 연구의 민주화와 접근성
현재 AlphaGenome은 비상업적 연구 목적으로 무료 API를 통해 제공되고 있습니다. 구글은 앞으로 전체 모델을 공개할 계획이며, 바이오테크 기업들의 상업적 활용 방안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런 접근 방식은 AI 기반 생명과학 도구의 민주화를 의미합니다. 대형 제약회사나 연구기관이 아니더라도, 전 세계 연구자들이 최첨단 게놈 분석 도구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혁신적인 발견이 나올 가능성을 크게 높입니다.
정밀의학 시대를 여는 새로운 열쇠
AlphaGenome이 가져올 가장 중요한 변화는 맞춤형 의료의 실현 가능성입니다. 각 개인의 유전적 특성에 따라 약물 반응이 어떻게 달라질지, 어떤 치료법이 가장 효과적일지를 예측할 수 있게 되면, 의료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미래가 내일 당장 실현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AlphaGenome은 그 미래를 향한 확실한 첫걸음입니다. AlphaFold가 단백질 구조 예측으로 노벨상을 받고 신약개발 혁명을 이끈 것처럼, AlphaGenome도 게놈 해석과 유전의학 분야에서 비슷한 파급효과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우리는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의학적 발견들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AI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 설계도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AlphaGenome 같은 도구들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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