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만든 저품질 콘텐츠를 뜻하는 “슬롭(slop)”이라는 단어, 들어보셨나요? 2025년 12월 중순, 미국의 권위 있는 Merriam-Webster 사전이 이 단어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습니다. 사전 측은 슬롭을 “인공지능으로 대량 생산되는 저품질 디지털 콘텐츠”라고 정의했죠. 그만큼 2025년은 AI가 만든 어색한 광고, 검색 결과의 질 저하, 스트리밍 앱을 채운 AI 음악 스팸으로 점철된 한 해였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이 선정에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Microsoft CEO 사티아 나델라는 연말 블로그 포스트에서 “슬롭 대 정교함”이라는 이분법적 논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AI를 인간의 잠재력을 위한 “비계(scaffolding)”로, 즉 대체재가 아닌 보조 도구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죠.

나델라는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 올린 ‘2026년을 바라보며(Looking Ahead to 2026)’라는 글에서 AI를 “마음을 위한 자전거(bicycles for the mind)”로 발전시켜야 하며, 인간이 이런 인지 증폭 도구를 갖춘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업 CEO답게 현학적인 어조로 가득한 그의 포스트는 AI 업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도구로 AI를 재포지셔닝하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출처: Looking Ahead to 2026 – sn scratchpad (Satya Nadella 개인 블로그)
나델라가 진단한 AI의 현주소
흥미롭게도 나델라는 현재 AI의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블로그에서 “모델 오버행(model overhang)”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는 AI의 기술적 능력이 우리가 그것을 실제 세계에 활용하는 능력을 앞지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AI는 대단해 보이지만 정작 실용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거죠.
그는 또한 “스펙터클(spectacle)과 실질(substance)”을 구분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말합니다. 초기의 과대광고와 놀라운 시연을 지나, 이제는 진짜 가치가 무엇인지 따져봐야 한다는 겁니다. 현재 모델들의 “들쭉날쭉한(jagged) 경계”—어떤 일은 놀랍도록 잘하지만 어떤 일은 엉망으로 처리하는 특성—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그래서 나델라가 제시하는 해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AI를 인간 대체재가 아닌 “비계”로 사고하는 새로운 개념. 둘째, 단일 모델이 아닌 여러 모델과 에이전트를 조율하는 정교한 시스템으로의 전환. 셋째, 실제 세계에서 검증 가능한 영향을 보여주어 사회적 허가를 얻는 것. 꽤 합리적인 진단과 처방입니다.
데이터로 본 가능성
나델라의 “대체재가 아닌 보조 도구”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이터도 실제로 존재합니다. AI가 인간 일자리를 대규모로 빼앗는다는 공포 서사가 퍼져 있지만, 실상은 더 복잡합니다.
MIT의 Project Iceberg는 AI가 현재 인간 유급 노동의 약 11.7%를 수행할 수 있다고 추정합니다. 그런데 이 수치가 “일자리의 12%를 대체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직무의 일부를 AI에게 위임할 수 있다”는 뜻이죠. 예를 들어 간호사의 서류 작업 자동화나 개발자가 작성한 코드의 일부를 AI가 보조하는 것들입니다.
더 흥미로운 건 Vanguard의 2026년 경제 전망 보고서입니다. AI 자동화에 가장 많이 노출된 약 100개 직업군이 오히려 나머지 노동 시장보다 고용 성장과 실질 임금 상승에서 더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겁니다. AI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대체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있다는 거죠. 이는 나델라의 “인지 증폭 도구” 프레임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합니다.
물론 그래픽 아티스트, 마케팅 블로거, 신입 개발자처럼 AI의 직격탄을 맞은 직군도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전체 그림은 “AI가 모든 걸 대체한다”는 단순한 이야기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쩌면 나델라의 비전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Microsoft의 현실은
문제는 Microsoft의 실제 행보가 나델라의 철학과 동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2025년 12월 보도에 따르면, Windows 11로 업그레이드할 자격이 있음에도 무려 10억 대의 PC가 여전히 Windows 10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Windows 11은 AI 기능이 대거 탑재된 버전인데 말이죠. 사용자들은 동의도 없이 강제로 밀어붙여진 AI 제품들에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있는 겁니다.
“슬롭”이라는 단어가 대중의 신경을 건드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AI가 생산하는 콘텐츠의 질에 실망했고, 원하지도 않는 AI 기능이 제품 곳곳에 끼어드는 것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죠. 나델라가 말한 “스펙터클과 실질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진단은 맞지만, 정작 Microsoft 제품들은 여전히 스펙터클에 치우쳐 있습니다.
더 아이러니한 건 일자리 문제입니다. 2025년 한 해 동안 Microsoft는 15,000명 이상을 해고했는데, 이는 기록적인 매출과 수익을 거둔 회계연도가 끝난 직후였습니다. 나델라는 해고를 발표하는 공개 메모에서 “AI 전환”을 회사의 세 가지 핵심 사업 목표 중 하나로 꼽았죠. 그는 내부 AI 효율성 때문에 인력을 줄인 거라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타이밍과 메시지가 겹치면서 “AI가 일자리를 뺏는다”는 내러티브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AI 관련 기업 전체로 보면 2025년 미국에서 거의 55,000개의 일자리가 AI를 이유로 사라졌다고 Challenger, Gray & Christmas 조사가 밝혔습니다. Amazon, Salesforce, Microsoft 같은 빅테크들이 AI를 추구하면서 대규모 감원을 단행했죠. 나델라의 “보조 도구” 철학이 실제 기업 운영에서는 관철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이론과 실천 사이
결국 나델라의 “슬롭이라 부르지 말아달라”는 호소는 단순한 용어 정정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건 AI 제품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과 싸우고, 일자리 불안을 완화하며, AI를 긍정적인 생산성 도구로 재포지셔닝하려는 빅테크의 전략적 시도입니다.
그의 진단은 정확하고, 데이터는 그의 비전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10억 대의 PC가 Windows 11을 거부하고, 수만 명의 직원이 해고되는 현실 앞에서,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큽니다.
AI가 정말 “마음을 위한 자전거”가 될지, 아니면 계속 “슬롭”으로 기억될지는 결국 사용자 경험이 결정할 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은… 글쎄요, Merriam-Webster가 이미 답을 내린 것 같습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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